Human in the egg
*소설 데미안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지만 데미안 팬픽은 아닙니다.
새는 알에서 태어나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
유명한 소설에 나온, 어느 똑똑한 사람이 적은 문장.
그 말대로, 사람들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선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을 부수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어린 아이가 집 밖으로 나와서 처음으로 유치원에 가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하지만, 그렇게 넓은 곳으로 나아가서 우리는 뭘 해야하는걸까.
그 소설에서는 새가 신을 향해 날아가고, 그 신의 이름이 아브락사스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 것이랬나.
그 말을 들으니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교관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여러분이 어찌 하느냐에 따라 신이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 생각하면 아브락사스라는 신도, 수련회 교관과 별 차이 없는걸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 신이라고 느낄수도 있고, 악마라고 느낄 수도 있는 존재.
세상이란 건 그렇다.
누구에게는 친절하지만, 누구에게는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기는 존재.
그렇기에 난 그 소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거겠지.
인간이 처음으로 세상을 나아갈 때, 자신의 알을 깨부수는 때는 언제일까.
아마 유치원, 그리고 학교에 처음 가게 될 때겠지.
하지만 이 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아직 그들은 순수한 어린아이들이다.
때 묻지도 않은 아이들.
그렇기에 그들은 세계의 순수한 면만을 바라보게 된다.
자신처럼 순수한 존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이렇게 계속 평화롭게 지낸다면, 그들은 세계란 이름의 알을 계속해서 부수는 데에 저항감을 갖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 세계가 그들에게 악마로서 접촉할 때가 찾아오는 법.
아이들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이미 여러번 부숴 본 어른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어른들은 저마다 제각각 다른 세상을 부수고, 그 과정에 많은 세계를 접했겠지.
아이들에게 있어서, 어른들이 아브락사스나 매한가지다.
어른들의 반응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세계를 부수고 어떻게 나아갈지를 정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어른들이 제일 큰 관심을 가지는 건 무엇일까.
아마 성적일 것이다.
물론 아닌 어른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 어른들은 다 그러더라.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처음에는 성적에 큰 생각을 두지는 않을것이다.
아직 그 가치를 모르는 아이들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엄마, 혹은 아빠, 어쩌면 조부모에게 성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성적을 본 보호자의 반응.
그것이 아이들의 세계라는 알에 큰 영향을 준다.
좋게 칭찬할 경우에는, 아이는 앞으로 더 나아가 더 넓은 걸 볼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더 넓은 세계로 펼쳐나갈 수록 알을 많이 깨서, 더 높이 날아갈 것이다.
그래, 모두가 이러면 정말로 최고의 세상이 되겠지.
하지만 세상 어른들이 다 이런 건 아니다.
누구는 아직 뭣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크게 혼을 내고, 성적에 집착하고 그러니까.
아이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세계를 부쉈다는 걸, 그동안 자신을 감싼 알이 깨져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세계를 부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 두려움이, 과연 아이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까?
어쩌면 잠시동안은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것이다.
자신이 좀 더 잘하면, 다음에는 아브락사스가 나에게 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거라고.
그런 희망을 가지고 다시 한번 더, 도전을 해볼 순 있을것이다.
그렇게 점차 나아지고 좋은 결과를 낸다면, 표면상으로는 괜찮아 보이겠지.
하지만 알을 깨는 데 필요한 것이 성공뿐인 건 아니다.
실패랑 실수,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것도 우리의 세계를 부수는데에 필요한 요소들이다.
애초에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패 할 수도 있다.
다 그러면서 한번 쯤은 자신의 세계를 부술 때가 있다.
응모했던 대학에 한번 떨어지거나, 아르바이트에 3일만에 해고되거나, 심하게 넘어지거나...
그런 부정적인 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아브락사스라 느끼는 주위가 악마로서 나타난다면.
실패를 할 때마다, 계속 악마를 접하는 두려움만을 느낀다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또 다시 알을 깨 부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더 날아갈 수 있을까.
날아가서 접한 아브락사스가 악마라면.
기껏 날아온 나에게 상처만 준다면.
그러면 그 새는 어쩌고 싶어질까.
따뜻한 알 속이 그리워지겠지.
그렇게 새는 다시 알로 들어가버린다.
아무 기복도 없이, 알을 깨부수지 않고, 그냥 얌전히 알 속에서 잠들어버리는 선택을 한다.
마치 나처럼.
난 오늘도 이불 속에서 웅크린 채로 침대에 눈을 떴었다.
마치 알 속에서 잠든 아기새처럼.
아니, 아기새라곤 할 수 없는 나이지만.
그렇기에 주변인들은 더욱 더 나를 원망한다.
어른새는 알에서 빠져나와야한다고.
하지만 나는 알 밖의 세상이 여전히 두렵다.
아브락사스가 이번에 나에게 어떤 고통을 줄지가 두렵다.
그렇기에 난 오늘도, 알 속에서 잠든다.
평화로운 이 세계를 부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그럼에도 바란다.
나의 아브락시스가, 나에게 다시 한번 더 희망을 줄 날을.
내가 알 껍질을 스스로 부술 수 있게 용기를 주기를.
내 마음에 빛을 주기를.